이 귀여운 화물차가 아우디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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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디 차량의 앞면 모습입니다

축구 마케팅, 헛돈 쓰지 않고 가장 재미 본 자동차 브랜드

브랜드 이야기, 자동차 칼럼니스트 이완

옛 조립 공장 앞에 복원되어 있는 슈넬라스터 모습

▶ 아우디 광팬들만 안다는 부활의 상징 슈넬라스터

자동차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내놓는 모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드 전체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모델은 제한적이다. 아우디의 경우 1980년 등장한 ‘아우디 콰트로’가 그럴 것이고, 1930년대 독일 레이싱 역사를 만든 실버애로우 군단의 좌장 아우토우니온 타입 C 등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시기에 큰 역할을 한 자동차가 있다. 아우디 광팬이 아닌 이상 ‘들어본 적 있나?’ 싶을 만큼 낯선 이름의 슈넬라스터(Schnellaster)가 그 주인공이다. 때론 버스로, 때론 트럭으로, 때로는 다목적 밴으로, 심지어 캠핑카로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브랜드 부활을 이끌었던, 흔히 말하는 언성 히어로급 모델이다.

잉골슈타트에 마련된 초기 아우토우니온 본사 모습

◆ 잉골슈타트 시대가 열리다

아우디는 잘 아는 것처럼 4개의 회사로부터 출발했다. 칼 벤츠 밑에 있던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벤츠와는 다른 자신만의 자동차를 만들겠다며 새로운 도전의 길을 택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를 만들었고, 이후 갈등으로 회사를 나온 뒤 다시 아우디라는 이름으로 자동차 회사를 만들게 된다.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휘청거릴 때 같은 지역에 있던 호르히, 아우디, 데카베(DKW), 그리고 반더러 등, 4개의 자동차 회사는 아우토우니온이라는 이름 아래 모였다. 그들은 각자의 엠블럼과 네 개의 링을 달고 온 유럽을 누볐다. 당시 아우토우니온은 독일 최대 자동차 회사였던 다임러-벤츠와 견줄 수 있는 규모와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잘 나가던 회사는 2차 대전 이후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패전국 독일은 4개 나라가 분할해 관리했고, 아우토우니온이 있던 켐니츠는 소비에트군의 통제를 받았다. 산업이 발달했던 켐니츠의 많은 기업이 간판을 내렸거나 점령군에 의해 국유화되는 절차를 겪에 되는데 아우토우니온도 별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걸까?

2차 대전 직후인 1945년 12월, 뮌헨 바로 옆에 있던 잉골슈타트라는 도시에 아우토우니온은 예비 부품 보관소를 만들었는데 결국 이곳이 새로운 출발지로 결정됐다. 다행이었던 것은 동독에 머물고 있던 아우토우니온의 많은 직원이 잉골슈타트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공장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는 숙련된 노동자들의 합류는 큰 힘이자 자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9년 아우토우니온은 다시 문을 열었다.

상업용 밴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슈넬라스터

◆ ‘앞바퀴 굴림 기술을 이용해 보자’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아우토우니온은 어떤 차를 내놓아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주정부와 투자자의 도움으로 문을 열기는 했지만 첫 모델이 자칫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제대로 된 도전 한번 못 해보고 무너질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은 패전의 멍에를 짊어지고 국가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화려한 자동차보다는 경제 부흥에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그런 생활형 자동차를 내놓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아우토우니온은 잉골슈타트의 첫 번째 모델로 슈넬라스터를 선택했다. 슈넬라스터는 우리말로 ‘빠른’을 뜻하는 슈넬(Schnell)과 ‘트럭’을 의미하는 라스터(laster)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트럭으로도 팔려나갔다

화물을 많이 실을 수 있어야 했고, 그래서 공간 활용에 좀 더 이로운 엔진룸이 앞에 있는 전륜구동 방식의 밴(VAN)을 탄생시켰다. 슈넬라스터와 거의 비슷한 시기(조금 늦게) 등장해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폴크스바겐의 마이크로버스가 뒤 엔진 후륜 방식이었던 것과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아우토우니온의 한 축이었던 데카베(DKW)가 전륜 구동 방식 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행정의 1리터 미만의 작은 엔진이 들어간 초기 슈넬라스터는 3단 기어에 20마력 수준의 출력을 보였다. 1962년 단종될 때까지 개선이 이뤄졌고, 이후 3기통 엔진은 4단 변속기와 조화를 이뤄 최고 32마력까지 출력이 늘었다. 이 차는 정말 다양하게 활용됐다. 트럭은 미국까지 진출했고, 밴은 마이크로버스만큼 사랑받았다. 또 고급 미니버스와 카라반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레저용 모델도 사랑받았다.

복원된 EV 슈넬라스터

◆ 전기차 슈넬라스터까지? 재건의 토대가 된 자동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우토우니온은 이 차로 새로운 도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5년부터 단종될 때까지 잉골슈타트에서는 100대의 EV 모델이 만들어졌다. 5 킬로와트 출력의 모터가 들어간 전기 밴의 최고 속도는 40km/h였고, 완충 후 최대 80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주로 전기 회사나 공공 기업 등에서 업무용으로 사용되었다. 몇 년 전 아우디는 EV 슈넬라스터를 완전 복원해 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현재 EV는 2대만 남아 있다.

슈넬라스터는 의외로 여러 곳에서 생산되었다. 스페인에 있던 아우토우니온의 자회사는 물론, 핀란드의 한 트럭 제조사도 10여 대의 슈넬라스터를 조립했다. 아르헨티나까지 건너가 1960년부터 69년까지 10년간 현지에서 라이선스를 얻어 생산되기도 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잘 복원된 모습이 지금까지도 올라온다. 소더비에서는 얼마 전 우리 돈으로 약 8천만 원에 경매되기도 했다. 잊혀진 듯 보였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이 차를 찾는 이들은 많고, 옛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많은 시도가 있다.

컨셉카

◆ 개인 추억이 아닌,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차

슈넬라스터를 첫 번째 모델로 선택한 것은 현명했다. 경제 재건의 시기에 어울렸을 뿐 아니라 회사 재건에도 일조했다. 만약 아우토우니온이 다임러 벤츠로, 그리고 다시 폴크스바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오래 남아 마이크로버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을 것이다. 독특하고 귀여운 디자인 속에 담긴 다재다능함으로 아우디 또 하나의 아이코닉 자동차로 널리 사랑받았을 게 분명하다.

이제는 과거가 돼 추억으로 남은 슈넬라스터. 누군가는 이 차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핫도그 팔던 차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의 추억에만 머물기엔 아쉽다. 그보다는 아우디의 잉골슈타트 시대를 성공적으로 열 수 있게 해준 의미 있는 자동차로 모두에게 기억되었으면 한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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