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에 자기 색을 입힌 한 천재 엔지니어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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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디 컨셉카가 있습니다.

아우디에 자기 색을 입힌 한 천재 엔지니어의 사연

브랜드 이야기, 자동차 칼럼니스트 이완

아우디 본사를 배경으로 회의하고 있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아우디에 남긴 세 가지 기술적 업적

1971년 1월, 아우디는 자신들의 의지와 각오를 담은 광고 문구 하나를 공개한다. "기술을 통한 진보 (Vorsprung durch Technik)" 아우디의 본격적인 역사는 이 슬로건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69년 아우토 우니온과 NSU가 합병을 한 직후 그들은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어야 했고, A4의 전신인 아우디 80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72년 탄생했다. 그리고 아우디 80의 판매가 시작된 첫 주, 페르디난트 피에히라는 삼십 대 엔지니어가 개발팀에 합류한다.

기술 분야를 총괄하던 루트비히 크라우스 이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포르쉐 자동차의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였으며, 포르쉐에서 이미 이름을 떨친 젊은 엔지니어였다. 1993년 폭스바겐 그룹 회장으로 아우디를 떠나기까지 20년 동안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디의 중요 기술적 성취를 이뤄낸 인물이었다.

당시 쌓아 올린 성과가 없었다면 피에히는 폭스바겐 그룹의 회장으로, 또 감독 이사회 의장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고, 살아 있는 독일 자동차 업계의 전설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아우디 역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긴 시행착오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아우디와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만남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시기에 이뤄졌다.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그림이 있습니다.

▶오일 쇼크가 가져다 준 기술적 성과들

1973년 1차 석유 파동이 찾아왔다. 이때부터 자동차 연비 효율을 높이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제조사의 생존이 달린 문제를 푸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아우디는 NSU 시절부터 활용되던 로터리 엔진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연비 효율 측면에서 당시 로터리 엔진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아우디는 많은 욕을 먹으면서 로터리 엔진을 포기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로터리 엔진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포르쉐에서 일할 때부터 5기통 엔진을 연구했던 그는 아우디 입사 직전 자신의 설계 사무소에서 메르세데스 벤츠에 들어갈 디젤 5기통 엔진을 설계하는 등, 이미 이 엔진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1976년 2세대 아우디 100 (A6 전신)에 5기통 가솔린 엔진이 들어가게 되고, 이때부터 5기통 엔진 시대가 열렸다. 벤츠는 2000년 이후 5기통 엔진과 작별을 고했지만 아우디는 지금까지도 그 특유의 엔진 사운드를 들려주며 5기통 승용 엔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5기통 엔진이 들어간 TT RS를 정면에서 본 장면 입니다.

2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을 겪은 1970년 대는 조금이라도 기름을 덜 먹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모든 자동차 제조사가 고민하던 시기였다. 유럽 제조사들이 이때 매달린 것이 디젤 엔진이었다. 아우디 역시 1970년 대 중후반부터 디젤 엔진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보쉬가 개발한 고압 분사 펌프와 터보차저를 효과적으로 결합되자 적은 연료로 엔진의 출력을 과거보다 더 높일 수 있게 됐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디젤 터보 직분사 엔진 TDI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TDI의 개발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8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5기통 TDI 엔진이 들어간 3세대 아우디 100이 공개되기까지 13년 이상의 긴 인내와 노력의 기간이 필요했다.

TDI 엔진이 있습니다.

▶소재와의 싸움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포르쉐를 떠나게 된 직접적 계기는 괴물 레이싱카 917 개발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 공기 저항을 줄이고 차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우디에서 개발을 총괄하게 된 그는 포르쉐 시절 뿜었던 에어로다이내믹과 경량화 연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함께 한 엔지니어들의 노력으로 공기 저항 계수가 0.30Cd 수준인 3세대 아우디 100을 양산할 수 있었고, 유년 시절부터 꿈꿨던 알루미늄 차체의 도전도 아우디에서 기어이 해냈다. TDI 엔진 개발 과정만큼이나 길고 힘든 시간을 거친 후 아우디는 1994년, 아우디 스페이스 프레임(ASF) 알루미늄 차체 기술이 들어간 고급 세단 A8을 내놓게 된다.

알루미늄 차체로 태어난 A8이 보입니다.

▶콰트로(quattro)

아우디 콰트로아우디 하면 기술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역시 콰트로다. 이탈리어로 ‘4’를 뜻하는 이 단어는 아우디가 개발한 승용 사륜 구동 방식에 적용돼 브랜드를 상징하게 되었다. 판매 모델의 80%가 콰트로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이런 콰트로의 탄생은 악재가 호재로 바뀐 경우라 할 수 있다.

아우디 콰트로 차량이 있습니다.

아우디는 회사를 구성한 4 곳 중 하나인 DKW가 만든 뭉가라는 이름의 군용 SUV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 연방군의 위탁 생산을 예상한 아우디는 네 바퀴 굴림이었던 뭉가의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나온 게 일티스라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모회사 폭스바겐에 개발 권리를 넘겨주면서 일티스와 아우디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테스트를 담당하던 엔지니어 예르크 벤징어는 이 차에 적용된 영구 사륜구동 방식을 승용에 맞게 개선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다. 사륜구동 세단에 별 생각이 없었던 페르디난트 피에히였지만 개발팀이 만든 사륜구동의 뛰어난 주행성에 매료돼 비공개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룹의 동의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우여곡절 끝에 개발 허가가 떨어졌고, 1980년 제네바 모터쇼를 통해 아우디 80을 기본으로 한 ‘아우디 콰트로’ 모델이 첫 선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콰트로는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WRC)에서 대 활약을 펼치며 아우디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최고의 여성 드라이버 미셀 무통, 전설의 드라이버 발터 뢰를, 스웨덴 출신의 드라이버 스티그 블롬크비스트 등은 콰트로의 우수성을 알리는 1등 공신들이었다.

1985년 WRC에서 아우디 콰트로를 운전하고 있는 발터 뢰를이 보입니다.

▶기술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들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1993년 폭스바겐 그룹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아우디의 마케팅 부서를 독립시켰다. 어쩌면 아우디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독립된 판매 마케팅 팀은 아우디가 프리미엄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비로소 자신들이 따라가고 넘어서고 싶어 했던 벤츠, BMW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아우디 시절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룹을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경영자로서 또한 그는 많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 개인적으로 가장 에너지 넘치던 때는 엔지니어로 많은 업적을 이룬 아우디 시절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그가 훌륭했던 것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수차례 밝혔듯 ‘아우디만의 기술적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기술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것은 프리미엄 브랜드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고, 피에히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우디에 아우디만의 색을 입힌 그는 엔지니어로 존중받을 만하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이제 현장에 없지만 50년 전 세상에 나온 ‘기술을 통한 진보’라는 구호를 열정적으로 실천한 그의 정신은 브랜드의 뿌리가 돼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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